05년부터 주욱 연례행사처럼 이어오고 있는 주제글쓰기. 올 해엔 깜빡할 뻔 했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누군가의 포스팅을 보다 순간 떠올라 후다닥 글쓰기 창을 열었다.
01. 두 나라에서 생에 첫 독립생활을 경험하다
대학원을 가야겠다고, 그 이전에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오겠다고 결심하고 회사생활을 정리할 때 나는 이후 생활에 대한 나름의 원칙을 세웠다. 바로 얼마나 비용이 들든 얼마나 힘들고 어렵든 모두 내가 온전히 감당하겠다는 것. 그래서 시작한 게 생활터전의 독립이였다. 우여곡절 끝에 좁지만 아늑한 집을 구해서 두달 여 가량 학교 어학원과 번갈아 오가며 지냈다. 사실 지금이니까 '좁지만 아늑한'이라는 낭만적인 표현이 나오지, 그 곳은 집이라기 보단 닭장에 가까운 고시텔이였다. 춥디 추운 한 겨울, 밤마다 불을 끄고 침대 위에 누워있으면 과연 내가 잘 하는 짓일까 그냥 이 악물고 적당히 회사다니다 적당히 결혼이나 하고 살까 이런 생각에 숨이 턱턱 막혀 제대로 잠을 청할 수 조차 없어 뜬눈으로 밤을 새다 슬리퍼를 질질 끌고 바로 앞 남자친구네 집으로 향하곤 했었다. 그 후 건너 온 호주. 한 주 먹고 살기 위해 한 주를 일 하며 삼시 세 끼를 꼬박 스스로 만들어 먹으면서 낯선 나라에서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는 불안한 마음을 달래려 얼마나 애썼던가. 그 긴긴 불안함의 터널은, 마음이 잘 통하는 사람들과 하나 둘 서로를 알아보고 다가가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통과할 수 있었다. 어느 순간 두려움이 눈 녹듯 사라지니 그 동안 눈치채지 못했던 삶의 주변부적인 것들의 소소한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어느새 나는 마치 처음부터 이 곳의 일부였던 것 처럼 그렇게 스며들어 갔다. 지금의 나는 두 번째 터전 생활을 슬슬 정리하고 세 번째 시작을 차근차근 달팽이처럼 느리지만 겨울을 대비하는 개미마냥 부지런히 준비하고 있다. 아직도 어려운 것들 투성이지만, '삶'이란 것이 무엇을 뼈대로 기초하여 무엇을 동력으로 더불어 굴러가는 것인지 아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그래서 이제는 전혀 새로운 곳에 가도 어떻게든 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이러다 덜컥 해외에 정착하게 될 지도 모를 노릇이다.
02. 호주로 생의 터전을 옮겨오다
첫번째와 조금은 겹치는 내용이기도 하지만, 엄연히 다른 의미가 있으니 따로 분류. 여행은 좋아하고 또 자주 했어도 한 곳에 진득히 눌러앉아 여행자가 아닌 생활인으로 살아본 건 이번이 처음. 게다가 그 지역또한 부담없는 가격과 거리감 적은 문화차이 등으로 늘상 드나들었던 아시아권이 아닌 미국과 유럽의 중간쯤 되는 위치에 걸쳐져 있는(개인적인 견해로 호주는 역사적 기반이나 언어적 측면에 있어선 확실히 영국을 위시한 유럽쪽이지만 이민자의 나라인 탓에 풍기는 다문화성이라든지 사회분위기와 가치관 등은 미국쪽에 가깝게 여겨진다) 나라, 호주라니. 이민자의 나라에서 살아보니 막연하게 여겨졌던 세계화라든지 신자유주의, 개인주의 등을 아주 선명하고 생생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됐다. 이 사회의 숙제는 그 때부터 지금까지 늘 '다양성을 유지하되 그 가운데 보편적 가치를 이끌어 내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키워드를 본의 아니게 온몸으로 고민하게 되면서 나 자신과 우리나라가 갖고 있는 고유성을 보다 객관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게 됐다. 다른 것은 다 차치하고 확실한 것 하나는, 이미 결혼이민 등으로 '단일민족'이라는 말이 무색해질 만큼 다민족 국가로 변해버렸음에도 그 다양성을 '별종'으로 취급하며 객관기준으로부터 철저히 배재하려는 한국사회의 보수성은 머지않아 스스로 목을 졸라 숨을 옥죄는 사회적 장애물로 작동하게 될 것이라는 게다. 그 사회 속에서 내가 하고 싶은, 그리고 할 수 있을 것 같은 역할을 이따금 떠올려 보기도 하는데, 글쎄, 어떻게 될런지는 잘 모르겠다.
03. 외국인 노동자로 육체 노동을 경험하다
내가 이 곳에서 경험한 두 가지 일은 모두 호주의 대표 산업인 육가공업의 공장에서 수출역군-_-으로 노동하는 것이였다. 이게 참 아이러니한게, 호주를 대표하는 산업의 현장을 들여다보면 막상 진짜(? 라고 하기도 애매하지만) 호주인보다는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노동자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이 땀흘려 떠받치고 있는 게, 바로 오늘날의 복지국가 호주사회인 게다. 당연히 대접받아 마땅할 이들에게 호주정부는 어떻게든 기를 쓰고 혜택을 덜 주려고 요리조리 머리를 굴리고 있으니 아이러니하다고 표현할 수 밖엔.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면 워낙 복지 수준이 높다보니 공장 노동자로 일 하고 살아도 한국에서 속칭 '화이트 칼라'로 살 때보다도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것 일까. 이런 걸 보면, 자국에서 석사 박사 받고 한국 와서 공장일 하는 동남아 노동자들 심정이 이렇겠구나 싶다. 또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과연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위해 누려야 할 기본적인 가치들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에 닿게 된다. 아마도 소속 사회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을 만큼 해당 사회의 구성원이자 온전한 개인으로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전달 해 주는 가치들일텐데. 고도로 발달된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의 차이라면 얼마나 다양한 종류의 가치를 보장해 주는가 아니면 결국 금전 하나로 수렴하는가 일까.
04. 소통의 의미에 한 걸음 다가가다
외국에 나와 살면서 매일같이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게 바로 의사소통에 대한 방법론이다. 잉햄 다닐 때, 예전에 이미 호주로 어학연수를 온 경험이 있어 영어를 정말 잘 하는 친구가 하나 있었다. 물론 그 친구는 넘치는 자신감으로 다양한 사람들과 말을 트고 지냈는데, 웃겼던 게 그 친구의 에티튜드란게 참.. 자기가 무슨 백인이라도 되는 줄 아는 양 비영어권 애들은 깔보고 영어권 애들은 자기가 필요할 때 쏙쏙 불러다가 유용하게(?) 잘 써먹고 다녔다는 거. 이를 테면 어디 가고 싶을 때 교묘하게 기사 겸 가이드로 부려먹는다든지, 대화를 정말 '소통'의 차원에서가 아닌 자기 어학 향상용으로 빈껍데기 뿐인 일상들을 과시하듯 늘어놓기만 하는 둥. 난 첨에 우리 한국사람들 끼리만 그런거 느끼나 했다. 근데 나중에 이 친구 그만둘 때 보니 별로 슬퍼하는 외국애들 거의 없더라. 난 사람을 좋아해서, 마음 가는 사람들이 생기면 그 사람에 대해 알고 싶어서 그 사람의 세계(관심사, 문화배경 등)를 영어로 공부하고 그걸 또 대화로 나누면서 부수적으로 언어 구사력을 늘려갔던 것 같다. 좋아하는 사람이랑 노래를 같이 듣고 싶은데 기왕이면 듣고 그 사람도 감동받을 수 있을 가사의 노래면 좋을 것 같아서 아이팟 속에 담긴 팝들 노래 가사 가사집 다 찾아가면서 해석해보고. 난 그 친구처럼 엄청나게 많은 외국애들이랑 다 말을 섞어보진 못했지만, 평생 연락하고 싶은 좋은 사람들을 몇 명 만났다. 언어를 배운다는 게 테크닉적인 측면을 익혀 스팩향상에 써먹으려는 거라면 모르겠다. 하지만 난 그저 소통하며 세상을 배워가고 싶은 것이였기 때문에 나의 방식이 옳다고 믿는다.
05. 미니스커트를 입게 되다
한국에서도 한창때(?) 다 지나서야 치마 늦바람이 들었던 나인데, 여기선 이제 미니스커트만 줄기차게 입고 다니는 거다. 이유는 네 가지(무려?) 정도 되는데. 하나, 너무 더우니까. 둘, 여기가 더우니 가게들도 짧은 치마를 훨씬 많이 들여놓으니까. 셋, 예쁘니까. 넷, 여기선 몸매랑은 무관하게 자기 입고 싶은 대로 입고들 다니니까. 덕분에 치마값 엄청 들어가긴 했지만 뭐. 나 좋으면 됐지 모. 한국에서 가져 온 무릎길이 치마들은 진지하게 버릴까 고민 중. 한국 가져가면 다시 입을까?
06. 외국인과의 연애를 경험하다
이런 제목을 붙여야 하는지 조금 고민스럽지만, 일단은. 근데, 그냥 사람 만나는 거, 남녀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문제들, 어디서 누굴 만나든 다 똑같겠더라.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우리나라에선 '연애'라는 것이 주로 2~30대의 키워드로만 통하지만 여기선 세대를 막론한다는 것. 철저한 개인주의에 기반해 굴러가는 이 사회는 만남도 동거도 결혼도 이혼도 출산도 이별도 지역사회와 가정간의 눈치 이런 것과는 전혀 무관하게 개인의지로 쉽게 쉽게 이뤄진다. 맘이 통하면 같이 살다 결혼 유무와 무관하게 애 낳고 그러다 헤어지고 다른 파트너 만나고 그러다 결혼 하기도 했다가 이혼 하기도 했다 그러는 거다. 우리나라처럼 세대별로 2,30대엔 만남과 결혼, 40대엔 육아, 50대엔 은퇴준비 뭐 이런 식의 얽메인 '정해진 수순'이 없어서 10대인데 애가 셋인 친구도 봤고 40대인데 클럽에서 부킹하는 친구도 봤고. 기본적으로 존칭문화가 없어 누구든 '친구'라고 부르는 탓이기도 하겠지만 이렇게 생의 '주기'라는 게 따로 없기에 서로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세계가 광범위해서 다양한 연령대와 함께 폭넓게 어울리고 그러다보니 '또래집단'이랄 것도 딱히 없고 이게 연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예전엔 왜 서양남녀들은 나이를 먹어도 예쁘장하게 잘 꾸미고 항상 서로간에 성적 긴장감을 형성하나 이해가 될듯말듯 했는데 이젠 좀 알겠다. 나 연말에 40대인 우리 '엄마'랑 같이 클럽 갔다니까. 게다가 우리 몸매 좋고 예쁘장한 '엄마' 애들 사이에서 서로 뺏아가려고 경쟁이 말도 아니였다. 아 그리고 조금 다른 얘기지만. 그래서 엄마랑 딸이 같이 같은 가게 들어가 옷 사서 나눠입고 이런게 또 가능하다. 세대를 초월해 여자는 그냥 다 같은 여자라서. girl은 번역되는 그대로 '소녀'가 아니라 '(매력있고 예쁘장한)여자'인지라 나이 결혼여부를 막론하고 그냥 갖다 붙여진다. 장점도 단점도 뚜렷한 이 사회, 사회속에서 사람 만나기. 내 경우 뭐 좋았던 점을 찾자면 이 가정에 그대로 스며들어 타자가 아닌 파트너로서 이 사회를 밀접하게 경험할 수 있었던 것 정도였을까. 아 이 것과 또 미묘하게 다른 게 '인터네셔널 비지터들 간의 연애'인데, 이건 정말이지 제 3 국에서 이 문화도 저 문화도 아닌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어 가는 전혀 새로운 관계정립이라는 점에서 또 다른 신세계. 예전엔 자신 없었는데 지금이라면, 그리고 상대가 공통언어인 영어를 하는데 크게 어려움이 없는 사람이라면 또 모르겠다 싶다.
07. 요리 내공이 쌓이다
호주 오기 직전 한국에서 혼자 잠깐 살았을 적에도 다양한 요리를 시도하긴 했지만 그 시도는 언제나 2% 부족한 결과물로 처참하게;; 마무리되곤 했다. 하지만 지난 일년간의 시행착오 끝에 이제 나름 대표메뉴들도 생겼고 냉장고와 컵보드에 늘 뭘 구비해 놓아야 하는지 - 그리고 그것들이 있으면 무슨 간단요리를 할 수 있으며 뭘 추가해서 사면 뭐가 가능한지도- 나름 알게 됐다. 으하하. 나만의 대표 3분요리는 크림뇨끼, 미역국, 김치전, 치킨크림커리, 소고기계란장조림. 얘네 중 김치전을 제외한 넷은 내 도시락 메뉴로 매우 애용되고 있으며 김치전은 맥주안주로. 나만의 접대요리는 잡채, 찜닭, 보쌈, 탕수육, 비빔밥, 불고기. 여기에 한국사람들 접대할 일이 생기면 매운 메뉴가 추가되어 닭갈비, 볶음짬뽕, 떡볶이에 튀김 이런게 들어간다. 냉장고에 항상 있어야 하는 아이템은 브로컬리(아님 컬리플라워)와 양배추, 양파, 베이컨, 크림, 계란, 김치정도. 컵보드에는 파스타(혹은 뇨끼)와 쌀, 고추장, 간장, 소금, 설탕, 후추, 고춧가루, 미림, 식용유, 후추, 라면 정도 둔다. 고기나 해산물은 할인할 때 왕창 사서 일 인분씩 봉지에 담아 냉동실로 직행시켰다가 두고두고 녹여먹는다. 의외로 식빵은 빨리 상하고 냉동실에 넣었다 녹여먹는다 해도 너무 오래 먹게 될 뿐더러 냉동실 자리를 많이 차지해서 잘 안 산다. 현재 지역이동을 앞두고 남아있는 재료 없애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의외로 잘 안 줄어든다.. 흑. 쌀이랑 면은 잘 안 상하니까 그렇다쳐도 김치랑 고기들은 언능 없애야 할 것 같아 김치찌개라든지 김치두루치기 이런 걸 만들어 먹는 중.
08. 드디어 까매지다
어렸을 적, 아니 멀리 갈 것도 없이 적어도 직딩시절 까지 정도만 해도 '뽀얗다'는 소리 많이 듣고 살았을 정도로 확실히 난 '하얀아이'였다. 그런데 나 여기 와서 정말 완전 탔다. 제대로 홀랑. 사시사철이 거의 여름에 가까운 날씨 탓이기도 하지만 야외활동 나갈 때 선크림 바르기를 소홀히 한 내 탓도 크다 -.- 아니 근데 어떻게 매일 외출할 때 마다 팔다리에 지극정성으로 선크림을 발라 댈 수가 있지? 귀찮아서 바디로션도 일주일에 두어번 겨우 샤워 마치고 꾸역꾸역 바를 동 말 동 한 아이가 나인데 -.-; 그래서 지금 내 몸을 보면 허벅지 스커트 딱 아래 길이가 제대로 까맣고, 엉덩이랑 등에는 비키니 자국에, 팔은 슬리브리스 셔츠 라인 따라 색감-.-이 달라서 내친김에 확 홀터넥을 애용해 골고루 태우기;에 돌입했다능. 킥.
09. 클럽, 파티 문화를 경험하다
딱히 클럽에 거부감이 있었던 것도 아니였지만, 제대로 가서 놀아본 적은 없던 나. 여기서 완전 늦바람;이 난 상태다. 만날 가서 출석도장찍고 그르는 건 아니고;; 가끔 맘 맞는 사람 생기면 좋아라 가서 안 빼고 정신없이 놀다 온다 뭐 이 정도? 큭. 여기선 소셜라이징에 있어 파티랑 클럽 행이 한국에서 술자리 빠지면 뭔가 제대로 친해지는 게 안 되는 것 처럼 작용된다. 그러니까 피해가는 건 자유지만 썩 좋을 게 없고 적당히 즐길 줄 알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파티와 클럽의 차이를 찾자면 누군가 호스트가 되어 집에서 여느냐 아님 다 같이 밖으로 나가느냐의 차이일까. 엄청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 각자가 좋아하는 술 한 잔씩 손에 들고 삼삼오오 수다 떨다가 스테이지 나가서 춤추고 뭐 이러는 거. 사실 아직도 낯선 애들이랑 이런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만나 말 트는게 썩 쉽지만은 않지만(난 소수정예 모여서 찐하게 노는 걸 더 선호하는 파!) 가끔 미친 척 이러고 노는 거, 은근 재밌다. 춤? 그거야 술 들어가면 막 나온다. 으하하.
10. 영어에 대한 흥미를 되찾아가다
사실 나 중고등학교때 가장 점수가 좋았던 과목이 국어 다음으로 영어였다. 우리때 치고 나름 빠른 초등학교때부터 회화학원을 다녔고, 중학교 때 영어수업시간 회화지문 짝꿍이랑 외워 주고받기 실기평가 뭐 이런거 할 때면 짝 없는 애들 파트너로 늘 지정 받아 다른 애들 한 번에 얼른 끝내고 싶어하는 걸 하루에 수번씩 달달 외워대면서도 좋아했을 만큼 영어를 재밌어라 했다. 하지만 정확히 대학 들어오고 나서 유학파 애들이 넘쳐나는 캠퍼스에서 바짝 움츠러드는 경험을 몇 번인가 하고선 자연스레 흥미를 싹 잃었더랬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지금. 머릿 속에 뭔가 들어있긴 한데 어떻게 정렬을 해서 문장을 만들고 사용해야 할지 감이 완전히 없어진 상태에서 호주라는 곳에 왔고, 사람들과 부대끼며 지내는 가운데 어떻게든 말을 해야겠다는 의지로-.- 더듬더듬 떠들어대다 조금씩 흥미를 되찾아가고 있다. 물론 말 제대로 못 하면 완전 무시하는 애들이 태반이지만, 그 와중에 인내를 갖고 계속 말을 붙여주는 고마운 친구들이 더러 있어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초반에 말도 제대로 못하는 나를 데리고 여기저기 다녀준 A, 쉬는시간 마다 종알종알 많은 얘기를 나눴던 W, '지식인의 언어'를 구사해 내 어휘력 향상에 어마하게 기여해 준;(남몰래 얼마나 사전을 연거푸 찾아댔던가-_-) B, 벙어리 적 시절부터 지금까지 만나면 항상 내가 편하게 이야기 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우리 엄마 Steph,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어쨌든 생활영어 향상에 지대하게 영향을 미쳤다고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는 구 남친 R까지(특히 연애할 때 필요한 표현과 욕 부분에 있어선 거의 전부를 얘를 통해 배웠다). 부족한 부분은 드라마나 영화, 책으로 채우고 있는데 지금까진 그냥 마냥 재밌다. 흥미가 떨어지기 전에 학원가서 공부하고 배워서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야지.
11. 나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다
사실 한국에서의 나는 그냥 평범한 직장인이였다. 글쎄, 누군가는 그러다 안정을 찾고 그러다 결혼을 하고 그러다 가정을 꾸리는 게 수순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그게, 나는 더 이상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없다고 한계를 그어버리는 것 처럼 여겨졌다. 오도가도 못하고 그냥 딱 망해버린 패배자인 양. 하지만 이곳으로 와 전혀 다른 삶을 살기 시작하면서 모든 게 달라졌다. 자꾸만 하고 싶은 게 늘어나는 거다. 가끔은 아무것도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에 막막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지금까지의 일년을 돌이켜보건대 시도해서 못 이룰 게 없다 싶네.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나는 남들이 가고 싶어 하는 일자리를 바로 잡았고, 지역이동해서 다시 자리 잡는 것도 차근차근 준비해 특별한 어려움없이(물론 엄청나게 고생도 많이 했지만 목표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고생이였지, 불필요한 재앙-_-은 구 남친-_-외엔 없었으니) 해냈으니 어디서 무얼 한다 해도 그냥 다 잘 풀어갈 수 있을 것만 같다. 나의 다음 목표는 다음 이동 지역에서의 재정착과 캠브리지 또는 아이엘츠 과정 이수를 발판으로 먼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소소하게 하고 싶은 게 자꾸자꾸 생긴다. 한국 가면 면허부터 따야하고 자격증도 몇 개 만들거고.....
매 해 1센티씩 조금씩 천천히 자랐다면, 지난 2011년엔 10센티가 한 번에 쑤욱 자란 것만 같은 느낌이다. 참 잘 했다고, 스스로 토닥토닥 어깨를 두드려 주고 싶다. 잘 했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