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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6. 나는 알지 :: 2012/02/17 21:53

이상하리 만큼 호주에서 일복이 좋았던 나는, 브리즈번에 다시 돌아와서도 첫 면접에 단박에 일자리를 잡았다. 항상 그랬다.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곳에선 꼭 연락이 왔고, 면접을 보면 면접이 곧 채용으로 이어져 나를 안도케 했다. 이번에도 잡 사이트를 뒤적거리다 어쩐지 나를 찾을 것 같다는 곳에 연락을 넣었더니 두어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면접시간을 잡아주었고 지난주 동안 영어시험이다 면접이다 신체검사다 통과하고 나니, 다음주 월요일 인덕션 나오라는 연락이 왔다. 남자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이 내 호주에서의 세번째 면접이였어. 그리고 나, 호주에서의 세번째 일자리를 구했어" 그랬더니 남자친구는 축하하면서도 억울해한다. "넌 내가 잉햄에 가기 전 얼마나 많은 곳에 이력서를 뿌렸는지 알아? 여든이 넘는다고! 심지어 우리나라 맥주 바에서도 나를 안 뽑고 웬 프랑스 남자를 뽑았다고! 날 받아주는 곳은 잉햄밖에 없었다고.. 흑흑"

어제는 오랜만에 브리즈번 초창기 친구 중 하나인 친구 H 커플을 만났다. 내가 시골에 짱박혀 소고기 포장하고 있을 때 그들은 농장지역으로 내려가 체리를 따고 돌아왔다. 장장 4개월, 5개월 만인가?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정말 어제까지 같이 붙어 지냈던 것 처럼 어찌나 좋던지. 그냥 편해서 신기했다. 누군가 내게 말했지. 진짜 친구는, 일년에 연락 한 두번 하고 얼굴 한 두번 볼까말까 해도 만날 때 마다 어제 만난 것 처럼 편하고 모든게 다 통하는 그런 사람이라고. 어제 이네들을 만나고서 새삼 우리가 얼마나 가까웠나 생각하게 됐다. 백년만에 싱가폴 레스토랑 가서 중국식 요리 시켜먹고 서로 근황 얘기하는데, 얘들은 세컨비자 포기하고 한달여 남짓 첫 비자 만료 전까지 브리즈번 인근 여행다니다 다시 본국으로 들어간단다. 왜 그러냐 물으니 여자애네 아버지 환갑잔치 때문이라고. 역시 이 친구들 다운 선택이랄까.. 들어가면 재취업 준비하고 돈 모아서 결혼할거라는데, 만날 주고받았던 농담 레파토리를 다시 건냈다. 둘이서 결혼하는 거 아니면서 청첩장 보내면 가만 두지 않을거라고 ㅋ 

밥을 먹고 장소를 옮겨 음료랑 디저트 먹으면서 미래 얘기 하던 중, 내가 남자친구랑 결혼할 걸 염두에 두고 어떤어떤 공부를 해 어떤 삶을 준비할 거라고 얘기했더니 얘들이 살짝 고개를 갸웃거린다. 왜 무슨 문제 있어? 얘들 왈, 나는 사물에 대한 호기심이 많고 사람들이랑 얘기하는 걸 좋아하고 완전 외향적인데 왜 그런 잡을 선택하려고 하냐면서 그러면 틀림없이 우울증 걸릴거라고 다른 잡을 찾으란다. 막 머리를 맞대가며서 내 미래 사업계획을 설계 해 주는데, 그 모습을 보고있자니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이렇게 내 미래계획을 진지하게 고민해주는 친구들을 이 먼땅 호주에서 만나 함께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이 순간이 얼마나 행복한가- 하는 것. 두번째는, 그게 정말 내 본 모습인가보구나 싶은 것. 내가 이 친구들에게 만날 하는 농담레퍼토리가 '둘이서 결혼하는 거 아니면 청접장 보내지 마'라면 이 친구들이 나한테 만날 하는 레퍼토리는 '우리 제씨는 얼마나 얌전하고 조용하며 가정적이고 요리를 좋아하며 꽃꽂이도 즐기고~' 하면서 온갖 여성스럽고 차분해 보이는 이미지의 활동들을 계속 생각하면서 갖다 붙이면서 놀리는 거(이거랑 내 웃음소리 따라하기 ㅋㅋ)다. 내가 글쓰기를 좋아한다고 해도 믿지를 않아! 하긴 우리가 항상 만날 때면, 나는 백미터 앞에서 부터 이름을 부르면서 마구 손 흔들면서 뛰어가고, 그걸 보는 녀석들은 '역시 제씨야'라는 표정으로 깔깔 웃으면서 손 흔들어 주곤 하는 걸. 너무 진지하게 내 성격을 분석 해 주길래(남자애는 자기네 나라 있을 때 HR 파트에서 일 했던 애라 이런거 분석하고 업무적성 파악해 주는게 전공이다!) 남자친구한테도 얘기해봤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아마도 그게 네 진짜 본 모습이 아닐까?" 확실히 그런 면은 편한 사람들 앞에서만 나오고, 그런 모습을 보일 수 있을 때 난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도 잘 알지만.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닌 이들 앞에서는 완전 선생님 스타일(또박또박 바른말만 쓰면서 공손하게, 하지만 적당한 거리감을 둘 수 있게)이 되는 게 나인지라. 나랑 안 친한 사람들은 친한 친구들이 나를 이런식으로 본다는 걸 들으면 기절하겠지 ㅎㅎ

아. 사랑스런 남자친구에, 돈독한 친구들도 곁에 있고, 새로 일자리까지 구한 지금.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다는 걸, 나는 잘 알지 :) 하루하루 감사하는 맘으로 즐겁게 지내야지.